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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노트

 

 

 

"예술/

예술은 다층 적이며 다각적이고, 규정 되어질 수 없으며, 누구도 이것이 전체 예술의 모습이다~ 라고 말할 수 없다. 예술은 어쩌면 허상이며 동시에 존재하기도 한다. 그것은 규정 되어질 수 없는 신비이다. 예술은 머리로서 추구 되는 학문이 아니다. 그 지점이 예술이 타 분야와 구별되는 이유이다. 이 세상에는 지구인 수 만큼의 서로 다른 색깔의 예술이 존재 할 뿐이다. 각자의 입맛에 맞는 것을 선택 할 뿐이다. 세계 최고의 몇몇 패션 디자이너와 패션 잡지 편집장들이 다음 해의 유행은 이런 것이다~ 떠들고 그 유행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두 촌스러운 자들인가? 아니다.

현재 어떤 예술적 사조가 대세를 이루는 가를 살펴 보는 것은 자유다. 그리고 예술가의 길을 가는데 있어 목적지를 정한다면 알아 두면 좋은 참고서이다. 하지만 그 길을 간다고 해서 당신이 예술가가 되는 것은 아닐 수도 있다.

나의 예술론은 이렇다

"최신의 예술을 따르고 그것들을 간파하고 전략을 짜는 것과는 아주 별개인, 얼마나 "나 다운, 나만의, 나로부터 비롯된 고유의 향기를 표출 하느냐." 그 길은 그래서 어렵고 거의 불가능 해 보이며 그것을 얻기 위해서 일생을 바치기도 하는 희생을 감수 해야 한다. 왜냐하면, 의외로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모르기 때문이다. 동시에 그 모든 것을 기꺼이 즐길 줄 알아야 하는 사도마조히스트가 되어야 하며 그 카타르시스를 위해 나머지를 포기하거나 희생하는 것. 그로부터 얻어지고 표현되고 경험 된 것들을 가지고 세상에 새로운 예술적 비전을 선사하는 것. 마지막으로 그것들을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 하나의 도구에 불과한 것, 거기에 함몰되거나 그것 없이는 자신의 존재 이유가 사라지는 불상사에 빠지지 않는 것.

"예술 행위는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내가 예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무언가를 창조한다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몇 안되는, 가장 신에 가까운 행위이며 자신의 구원이다."

 

 

ㄴ"

 

"모든 것에는 각자의 거리가 존재한다./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일정한 거리를 두어야 한다. 각자의 그림에는 최적의 감상을 위한 각각의 거리가 존재한다. 거리가 너무 가까우면 전체를 보지 못하며 거리가 너무 멀면 그림의 세세한 디테일을 감상 할 수 없다. 그러하듯 모든 것에는 적당한 거리가 존재한다. 사랑 또한 서로의 거리가 없으면 신비와 그리움, 아름다움은 사라지며 갈등이 태어난다. 세상과 삼라만상을 바라볼 때도 그 속에 함몰되면 극단적인 시야를 가지거나 전체의 흐름을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이 무엇이건 어떤 관계이건, 서로의 거리가 필요하다. 그것을 깨달은 자는 자신과 자신 사이의 거리 또한 유지한다. 자신을 관찰한다. 자신을 냉정히 관찰하지 못하면, 세상 또한 관찰 할 수 없다. 세상은 자신 투영의 확장이기 때문이다.

 

"회화 한 점 속에는/

어제의 결정이 오늘의 번복이기 일수이고. 어제의 만족이 오늘의 불만이기 일수이며, 육체와 정신 상태에 따라 여기서 타협하느냐, 이를 악물고 더 가느냐의 연속이며, 과거의 모든 경험을 나열하여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며,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시도를 행하느냐 마느냐의 모험이며, 현재의 집착과 몰입이 오히려 전체를 훼손 하는가의 신중함이며, 남모를 기만을 스스로에게 가하느냐 마느냐의 자기 검증이며, 독창성에 대한 집착인 동시에 타인의 평가에 대한 의식을 지속적으로 버리고 또 버려야 하는, 그 모든 것을 거친 뒤 무언가가 잘 못 됐다는 것을 느낄 때, 뒤엎어 버리고 다시 시작하는 결단의 연속이다.

 

 

그것이 살아있다는 것,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얼마나 엿 같은, 짜릿한 존재성인가.

 

 

"입력된 프로그램/

철학적 궁극의 도달 점은

“우리가 원했던 의미와 답은 없었다.”로 끝내 귀결된다. 단지 끝없는 모호성의 향연으로 매듭 짓는다. 그곳에는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인간 차원의 수 많은 비루한 의미들이 무력화된다. 단지 생멸의 무한 반복일 뿐이다. 그 반복을 유지하기 위해 "대 질서"가 유지된다. 에너지의 자체 보존 확장을 위해 이 모든 것들이 작동된다. 목적이 있다면 오로지 그것 뿐이다. 지금 이 순간만이 우주의 전부이며 실체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얼마만큼 자신의 의식을 투명하고 명료하게 유지 할 수 있는가“ 뿐이다. 하지만 그 “의식”이라는 것 또한 아주 그럴싸한 착각이다. 그 의식은 사실 무한 반복하는 생멸의 굴레 속에 작은 일원이 되어 충실히 맡은 역할을 하기 위한 입력된 프로그램일 뿐이다.'

 

 

 

 

"예술가가 가장 완벽 할 때는 자신의 모든 불완전 함을 작품에 이용할 때 뿐이다."

 

 

 

 

“거기에는 오로지 회화만 존재한다./

 

회화에는 추상, 구상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회화만 존재한다. 거기에는 고전, 현대의 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 인간의 손에 의해 그려진, 시각이 인식할 수 있는 형태와 색상만이 존재 할 뿐이다. 눈으로 인식하는 현상 너머의 세계 또한 인간의 의식으로 다듬어져 표현된다. 그 지점부터 현상 너머의 세계 또한 이미 인식되는 현상으로 옭아 메어지고 존재하고야 만다. 눈으로 인식되는 세상의 표피 또한 안구를 거쳐 뇌에서 작용되는 전기적 반응을 통해 조합 된 잔상일 뿐이다. 그래서 구상은 결국 추상일 수도 있다.

 

사람들은 고전주의를 거쳐 더 무엇이 없을 까~ 라는 지극히 지루한 지적 호기심과 장시간을 요 하는 구상 작업의 힘겨움을 그럴싸하게 회피할 수 있는 소위 추상이라는 세계를 창조 했다. 그리고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끝없는 답이 없는 질문들을 생산해 나아가고 그 질문 자체를 위대한 현대미술이라 일컫는다. 머리는 복잡해지고 설명은 장황 해지며  늘어 만  가는 비평의 수요는 말장난으로 전락한다. 모든 회화는 신기루의 기록일 뿐이다. 모든 이름 붙여진 이분법을 목표로 하는 장르들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성이란/

"인간에게 있어 이성이란 인간의 욕망과 본능을 가장 정교하고 그럴듯하게 실현 시키기 위한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기능일 뿐이다. 그 모든 것을 추적하면 결국 생존과 번영이라는 지극히 동물적인 본능과 조우한다. 단지 자아를 가진 인간만이 이성이라는 과도한 도구를 사용할 뿐이다."

"선과 악, 그리고 무신론과 유신론/

그동안 수많은 철학자들이 선과 악에 대하여, 신의 존재 유무에 대하여 자신들의 견해들을 펼쳐왔다. 철학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 사람들 또한 살아가며 한번즘 깊이 이것들에 대하여 생각 해 보았을 것이다. "선은 무엇이고 악은 무엇인가? 선과 악은 존재 하는가? 과연 신이 존재한다면 왜 악을 처단하지 않는가? 그래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악 또한 신의 계획에 포함되는 것이며 그래서 신은 존재한다?" 등등. 이 모든 탁상공론들은 한마디로 "어리석은 짓거리." 일 뿐이다.​ 왜냐면 그것들을 생각하고 규정 짓는 주체는 보잘 것 없는 "개인"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소크라테스처럼 "모른다."가 현명하다.

 

또한 그 무의미한 어리석은 고뇌를 되풀이 하는 동물은 적어도 이 지구상에서 오로지 인간이라는 유인원 밖에 없다. 인간은 규정 짓고 프레임화 시키는 것을 매우 좋아하는 동물이다. 하지만 우주 만물은 흑과 백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선과 악, 신의 존재유무 따윈 관심 없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이 우주 삼라만상은 너무도 따스하며, 너무도 냉혹하고, 너무도 풍요롭고, 너무도 빈곤하며, 너무도 신선하고, 너무도 늙어가며, 너무도 평화롭고, 너무도 혼란하며, 너무도 행복하고, 너무도 고독하며, 탄생과 죽음이 반복되며, 그 모든 것들의 이유는 영원한 미스테리라는 것 뿐이다. 이 우주가 오로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이것 뿐이다.

"생존, 그것을 위한 질서"

"이왕이면/

 

당신이 속해있고 따르는 종교, 이념, 정치, 법률, 교육, 문화 등, 모든 것은 당신이 창조한 것들이 아니다. 당신이 속해있고 따르고 옳다고 믿는 거의 모든 것은 누군가 가, 어떤 집단들로부터 부여되고, 권유 되고, 주입 된 것들이다. 한마디로 당신 스스로 창조한 것은 단 하나도 없다. 거창하게 위에 열거된 것들을 굳이 창조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그것들은 좀 더 스케일이 큰 배포와 인류를 위한? 혹은 그것을 가장한 자기 욕망의 확장에 의거, 세상의 질서와 인간 통제를 목표로 한 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고, 사실 불완전한 우리 인간들에게는 어쩌면 필요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것의 부작용이 50%를 넘지만 않는다면.

 

좀 더 시야를 좁혀, 우리 각자 매일의 삶에서 오로지 자신에 의한, 자신만이 창조한 것들이 얼마나 될까? 자신의 생각과, 마음과 손에 의해, 태어나고 창조 된 것들이 얼마나 될까? 우리의 생명 에너지의 본능에 충실해서 모든 것을 차치하고 탄생 되는 것은 고작 아이를 가지는 것 뿐 인가? 사실 그 태어난 아이 또한 결국 기존, 누군가들에 의해  만들어진, 이미 견고하게 존재하는 사회 시스템 속으로 기꺼이 위탁 되고 고유의 창조성과 생명력을 다수의 하나가 되는 길로 만들어버린다. 

 

우리는 그것이 보 잘 것 없어 보이고 무의미 하게 보일지라도 우리 삶의 매일을 자신만의 창조로 채워 가야 한다. 그것이 삶의 가치관이건, 요리이건, 그림이건, 음악이건, 춤이건, 글쓰기건, 심지어 패션이건, 좀 더 나만의 것들로 채워 나아갈 때 삶은 생명력을 갖는다. 누군가 가 만들어 놓은 길을 가는 것은 아주 쉽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삶이 아니다.

 

나의 길을 만들어 가는 것은 무척 어렵다. 하지만 그 길은 세상에 단 하나, 나만의 길이다. 세상이 이토록 유치하고 거지 같은 이유는 자신만의 삶을 창조하고 그것의 결과를 기꺼이 책임! 지려는 자들이 극소수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그 길을 가기 두려워하기에 그 길을 기꺼이 갔던 자들의 책을 읽고, 그런 이야기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며 대리 만족을 느낄 뿐이다. 나는 평생 그 길을 가는데 있어 두려움과 깊은 고독, 절망을 느낄 때 마다 내 마음의 목소리에 귀 기우린다. “창조적으로 살든, 비 창조적으로 미비하게 살든 나는 곧 죽는다. 이렇게 살든 저렇게 살든 죽음이 눈앞에 있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어떻게 살거냐?”

언제나 결국 답은 하나 다....."

"뒤샹을 죽여라/

 

미술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이 천재가 만들어 놓은 변태적 조롱 행위의 뫼비우스 띠에 걸려들어 충분히 지칠 정도로 기만 당했고, 역으로 그것을 이용해 왔다. 미술은 이제 “자기 모순”에서 깨어나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한다. 뒤샹의 망령에서 벗어나 자신과 마주해야 한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여라” 와 같은 맥락에서 이제 미술은 “뒤샹을 죽여야 한다.” 미술은 수많은 트릭과 기만, 관행과 위선의 가면을 벗어던지고 개념이 전시 되어버리는 아이러니에서 벗어나 다시 가슴으로 회귀해야 한다. 비평은 최소화해야 하며 그 비평은 시가 되어야 한다. 미술을 실행하는 주최자들이 보다 자신만의 확고한 비전과 철학을 만들어 가는데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는 동시에 그 철학이 작품의 전면에 나서는 주객전도의 딜레마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예술은 다시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와야 한다. 우주의 셀 수 없는 별들처럼, 미술, 예술은 셀 수 없는 각자 개인, 고유의 빛나는 별로 탄생 되어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을 기반으로 탄생 된 자신의 작품에 대해 누군가 들은 글을 쓸 것이고, 누군가 들은 질문을 할 것이다. 그 순간 당신이 작품과 일치하는 삶을 살아왔다면 그 설명은 굳이 당신의 입을 통해서 가 아닌, 당신의 삶으로서 자연스레 설명될 것이다. 작가의 철학은 그 작가의 삶에서 느껴지는 것이지 작품이 전부가 될 수 없다. 누군가 가 당신의 작품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말 할 수 없는 감응인 것이지 당신의 설명에 의해서 가 아닌 것이 되어야 한다.

 

 

나는 뒤샹을 죽인다.

 

미술은 원시 성을 회복해야 한다."

"단순 명료함/

당신이 그 무엇을 평생 연구하고 노력했든, 그 결과와 통찰들이 더더욱 과거보다 복잡하고 난해 해졌다면, 당신, 전 인생의 노력은 헛수고인 것이다. 모든 위대한 정신은 오로지 끝내 단순함으로 귀결된다. 그 단순 명료함을 획득하기 위해 가장 난해하고 복잡하며 험난한 관문들을 통과해야 한다."

"밀도/

예술이 영원할 수 있는 이유는 예술에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예술이 존속하는데 있어 얼마나 기가막힌 안전장치인가. 하지만 예술에 정답은 없지만 밀도의 높낮이는 확실히 존재한다."

"위대한 문명/

지구역사 이래, 자연계의 시선에서 인간이란 유인원이 지구에서 한것이라고는 모든 동물들 중에 가장 커다란 불필요한 둥지들을 무차별 적으로 여기저기에 만든 것 밖에 없다. 그리고 인간들은 지들끼리 그것을 "위대한 문명:"이라 말한다."

"드라마를 창조하라/

 

우리가 가장 일상에서 접하기 쉽고 가까이 하는 예술 쟝르는 음악과 영화다. 그 이유는 인간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성. 그리고 그 시간 위에 쓰여지는 희로애락의 기승전결. 한마디로 그 시간 동안 인간은 그 드라마에 몰입한다. 회화는 한 화면에 모든 것이 일순간에 관객에 노출 된다. 거기에 관객에게 부여되는 구조적 시간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회화에서의 시간이란, 그 그림이 완성되기 까지의 시간과, 완성된 후 관객이 그 작품 앞에 얼마 동안 멈추어 있는가 의 시간만이 존재한다.

 

그래서 회화에서의 시간이란 그 작품이 세상에 공개되기 전 까지의 시간적 레이어가 가장 중요하며 전부라 말할 수 있다. 관객이 작품 앞에 대면했을 때, 의식, 무의식 적으로 얼마만큼 그 보이지 않는 작품이 완성 되기까지 의 레이어 느끼게 하는가가 관건이다. 완성된 표면이 그 무엇이었건 그 레이어가 거짓 없는 충실한 과정을 거치고 화면에서 느껴지는 모든 조합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회화가 음악이나 영화처럼 호소하지 않더라도 가장 고난이도의 드라마를 창조 할 수 있다. 그것은 가장 어려운 궁극의 창작이다. 그 기적과도 같은 단 한방을 위해 평생을 보낼 수도 있다. 그것이 무슨 장르이건, 무슨 화풍이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드라마가 있어야 한다."

"미술에서 주제로서의 사회문제/

 

사회적 이슈를 갤러리 전시 공간으로 옮기는 것은 지극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워야 한다. 그 이슈를 용감하고 과감하게 수면 위에 들추어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 사회적 이슈가 자칫, 그것을 차용하고 표현하는 작가의 작품에 그럴듯한 있어 보이는 치장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또한 반복적인 그런 작업 활동이 어느새 그 작가의 시그니처가 되어버리고 사회 이슈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는 지성인으로 어필하는 수단이 된다는 것이다. 작가가 만일 참을 수 없는 사회적 문제 제기를 원한다면 그것이 표현을 하지 않으면  안되는 지점일 때에만 이루어져야 하며 그 행위 만을 가지고 평생을 지속해서는 안 된다. 작가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목격하고, 느끼며, 통찰 해 가는 모든 것을 표현하고 기록하는 자일 뿐이다. 만일 그러하다면, 그 작가의 작품에는 오로지 사회적 이슈만이 존재 할 수 없다. 내가 제일 혐오하는 작품은 어제까지 비극이었던 사건들을 아주 세련되고 멋진 공간에서 선보이는 작품들이다. 정말로 그 비극을 다시 한번 상기 하고자 한다면 현장답사나 지난 뉴스를 찾아보는 것이 더 교육적이다."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라캉. 비평/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개념의 의미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자발적 욕망이 아닌, 의식 무의식 적으로 부모로부터 사회로부터 주입 되고 요구된 것을 자신도 모르게 욕망 한다는 의미이다. 이 말은 마치 그러지 말라 라는 늬앙스로 현대인들에게 요즘 받아들여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나는 “인간은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라캉의 이 유명한 개념을 난도질 하려한다.

 

일단 라캉은 타자와 나 자신을 구분한다. 분명 현상계에서는 나와 타자, 나와 세상으로 구분되어 지게 끔 프로그래밍 되어있다. 만일 라캉의 개념이 현상계 내에서만 유효하다고 선언 했다면 그나마 봐 줄만 하다. 허나 끝까지 추적하면 그 도달 점에는 나와 타자는 구별할 수 없는 지점으로 향한다. 나라고 믿는 자아, 육체, 인간의 머리로 구분 짓는 모든 이분법, 마음의 장난이 곧 내가 아니라는 지점까지 도달하게 된다면 그곳에는 인간의 뇌로는 이해 할 수 없는 영원한 무지의 광대한 에너지의 바다와 조우한다. 그 에너지는 때로는 분할되고 응집하며 어느 순간 물질화된 육체의 형태로 형상화되고 육체는 생존을 위해 나라는 자아를 형성하게 된다. 그리고 그 자아는 보존을 위해 세상과 나를 구별한다. 하지만 그 작은 에너지의 응집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흩어지고 광활한 에너지의 바다로 회귀한다. 그것이 현상계의 죽음이다.

 

한마디로 본질은 나라고 믿는 자아는 임시적인 허상이며 거기에는 나와 타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배고픈 이의 최대 욕망은 한 끼의 식사이다. 그에게 내가 한 끼의 식사를 제공하고픈 욕망이 있다. 둘 다 욕망이다. 배고픈 이를 돕고자 하고 그로인해 배고픈 이가 행복한 모습을 보고자 하는 것 또한 나의 욕망이다. 결국 타자의 욕망을 채워줌으로서 나의 욕망을 채운다. 부모의 바람을 채워 나가면서 동시에 보람을 느끼고 그것에 만족을 느끼는 이도 적지 않다.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 라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부정적 의미가 될 수 있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욕망일 수도 있는 말이다. 그것은 개개인의 차이와 선택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좀 더 깊이 접근하면~ 과연 나 자신만의 욕망이라는 것이 존재 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에 도달한다. 나의 욕망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가. 나에게서 발현된 욕망이라는 것은 결국 나의 감정, 호르몬, 세포. 여러 다양한 화학적, 생물학적 반응들의 투영일 뿐이다. 하지만 그 화학적 생물학적 본능이 소위 “나”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들이 내가 아니라면 과연 “나”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모든 것을 지워 나가면 결국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잠시 착각 속에 있다가 광대한 “무지”의 상태로 회귀할 뿐이다.

 

결국 그 지점에서는 나와 타자는 구분되지 않는다. 인간은, 모든 존재는 그것이 나라고 착각하든, 타자라 선을 긋던, 그저 욕망 할 뿐이다. “인간은 욕망을 욕망 할 뿐이다.”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지 않고 나의 욕망을 욕망했다~ 라는 착각을 깨닫게 된다면 결국 나와 타자/나와 세상의 이분법이 무기력해지며 그저 “존재는 욕망한다. 그 욕망은 철저히 ”에너지의 보존과 확장, 생멸일 뿐이다.”로 귀결된다.

그 지점까지 도달하면 인간이라는 동물은 오히려 타자의 욕망을 더더욱 욕망해 나아간다. “나”라는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닫기 때문이다."

“NEW WAVE는 영원하다/

 

모든 유행과 사조, 가치가 충만을 넘어 포화상태에 이르렀을 때, 언제나 그 모든 것을 쏟아 낸 뒤 원점으로 돌아가려는, 혹은 새로운 패러다임을 시작하려는 움직임이 생겨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마치 아침에 동쪽에서 해가 뜨고 서쪽으로 해가 지듯이 매일 매일의 탄생과 죽음, 그리고 부활의 연속인 것과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 메커니즘을 안다면 거기에는 새로울 것도, 낡은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친다.

 

NEW WAVE는 영원하다.

하지만 그것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전적인 새로운 것으로의 항해가 아닌, 이미 존재계가 탄생했던 처음 그것으로의 회귀인 것 뿐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향해 앞으로 전진하고 있다고 굳게 믿고 있지만, 사실 그것은 이미 최초의 그 자리였던 것이다. 그러하여.....

나는..... 그 최초만을 원한다.... 처음이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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